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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을 매길 수 없는 화폐』후기

손서락
2024-08-30
조회수 93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신 송도영 교수님은  『값을 매길 수 없는 화폐』를 읽고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어떤 통찰을 느끼셨는지 궁금했는데 아래와 같은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 지금부터 백여 년 전인 1922년, 말리노프스키라는 인류학자가 『서태평양의 항해자들』(Argonauts of the Western Pacific)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은 남서 태평양 멜라네시아 사회를 구성하는 열여덟 개의 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물교환 방식(“쿨라”라고 불리는)을 중요하게 다뤘다. 쿨라는 멜라네시아 각 섬 대표들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이 선물을 가지고 항해를 해서 다른 섬에 가 전달하는 행사다. 선물 물품들 중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조개껍질 목걸이도 있고, 다른 것들도 있는데, 대개 실용적이지 않은 장식품들이다. 
  선물을 받은 섬사람들은 선물을 가지고 온 이들에게 바로 답례품을 주지 않는다. 대신 받은 선물을 어느 기간 가지고 있다가 제 3의 다른 섬에 가지고 가서 전달한다. 그런 식으로 선물들은 이 섬에서 다시 저 섬으로 전달되고 또 전달된다. 결과적으로 선물은 여러 섬들을 한 바퀴 빙 돈다. 그리고 다시 계속 계속 돌아다닌다. 귀한 가치를 인정받는 그 선물들은 한 집단의 손에서 다른 집단의 손으로 계속해서 건네어지는 소중한 물품들이다. 누구도 그것을 영구 ‘소유’하지 않는다.   
  말리노프스키는 멜라네시아의 쿨라 시스템이 단순한 생계경제나 물품 교환을 넘어서는 사회의 총체적 관계망을 만들고 지속시키는 장치라고 해석했다. 선물교환 시스템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는 ‘파트너십’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선물을 준비하고 다듬는 과정에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간다. 선물이 도착하고 떠날 때는 성대한 종교적 의식이 열린다. 선물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과정의 연속을 통해 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멜라네시아 섬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다듬으며 생활을 영위해간다. 그것은 망망대해의 불확실한 기후적 지리적 환경 속에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조난과 각종 위험 상황에 대한 열여덟 개 섬 사회의 느슨한 공동체적 네트웤을 만든다. 
  2024년, 한국에서 출간된 에드가 칸(양혜란 옮김)이 쓴 책 『값을 매길 수 없는 화폐 –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를 위한 타임뱅크』는 우리 사회의 경제체계에 대한 역사적인 관찰과 반성에서 시작한다. 우선 호혜적 품앗이와 공동체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인정받는 명목화폐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현대 자본주의의 화폐경제가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망을 스스로 지속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공동체와 관계의 문화적 전제를 빚어내는 시스템은 화폐경제와 속성이 다른 이른바 ‘코어’(Core)경제라고 이야기한다.
  코어 경제는 사람과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로서의 가치관, 존재의 의미, 상호작용의 기본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경제다. 현대 자본주의 조차도 사실은 가족과 이웃사회,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리에 의존해야 사회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생각과 활동과 상호작용들이 명목화폐의 숫자로 계산되는 방향으로(“사랑도 우정도 전부 돈으로 계산하려 하는...”) 사회는 흘러왔다. 결국은 그 명목화폐로 치환될 수 없는 — 그러니까 직접 계산적으로 맞바꾸는 방식으로는 형성되거나 유지될 수 없는 --  호혜적 공동체 시스템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에드가 칸은 진단한다. 그 결과 급격하게 개인주의화하고 분절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정서적으로나 생활의 영위를 위해 일상적으로 돌보고 챙겨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게 된다. 예를 들면 고령화 사회에서 고립되어 가는 노인들의 장보기를 도와주고 간병을 할 사람을 구하려면 웬만한 소득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돈(명목화폐)이 들기에 더욱 절망적이다. 
   “인류라는 종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것, 인간이란 종이 생존하고 진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모든 것이”(서로를 돌보는 능력/ 서로에게서 배움/ 서로를 위로하기/ 축하하기/ 함께 결정하기/ 옳은 것을 위해 함께 저항하기/ 서로를 웃겨주기 등등...) 명목화폐로 계상되는 재화의 형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현대 사회 시스템이 확장 중이다. 그 속에서,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고 소비할 재화가 넘쳐난다는 오늘의 한국 사회는 가족의 해체, 이웃 공동체의 와해, 개인의 파편화, 관계의 단절, 소외와 우울증, 혐오와 분노사회 현상, 불안감의 급증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자살률, 이혼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을 겪으며 사회 자체가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무의식의 저변에서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명목화폐로만 계산되는 사회에서는 온전한 정서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이 결국 무의미하다는 것을. 일시적이나마 높은 소득과 연봉을 뻐기며 그 화폐 액수로 인정받던 자신의 존재 가치가 퇴직 후 노인이 되면서 결국은 소멸되고 버려질 것을. 의미와 정과 존재의 가치를 서로 인정해 주며 시간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이웃과 공동체 관계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헤어지고, 연락도 끊고, 혐오하고 상처받고, 원망하고 자살하고, 그리고 이런 암울한 사회의 미래를 이어갈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어두운 미래를 향해 가는 저출산 고령화의 한국 사회, 나아가 전 지구적으로 인구 감소의 길에 들어선 후기 산업사회의 세상 모두에 절실한 대책은 과연 무엇인가? 에드가 칸은 말한다: 대안은 모든 인간의 심리와 행동과 관계를 명목화폐로(돈으로) 계상하고 그런 방식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 온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돌봄 사회의 회복’, ‘모든 인간 존재의 가치의 회복’, ‘관계의 회복’이 가능한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한 일 아닐까? 대안적 패러다임은 의외로 너무나 간단한 데서 시작된다. 바로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없는” 시스템, 누구의 한 시간이건 동일하게 소중히 여기는 시간의 유통을(타임머니) 매개로 존재의 의미, 관계 회복을 꾀하는 ‘타임 뱅크’의 패러다임이다. 더 궁금하다면, 25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이 소책자의 일독을 권한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당신의 25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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